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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룡동
팀명 청룡동 등록일 2015-11-30 조회 3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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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천안군의 군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샛골(鳥洞) 삼거리
(三巨里) 무상리(舞裳里) 둔지리(屯地里)를 합하여 삼거리와 龍馬山의 머릿자를
따서 삼룡동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호남과 영남의 갈림길이고 따라서 길文化(路邊文
化)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가던 곳이다. 길가던 나그
네의 많은 애환이 서려있고 민요따라 흥청거리는 능수버들로 뒤덮인 곳이다.
전라도 고부땅의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와의 연담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지
금은 독립기념관의 입구로서 또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구실을 다하고 있다.

삼거리(三巨里) : 삼거리 방죽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대전으로 가는 국도변에
발달된 마을. 이 마을의 중앙지점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천안삼거
리다. (原三巨里)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군수물
자를 수송하려고 신작로(新作路)를 만들면서 옛길은 없어지고 지금
의 국도가 생기면서 오늘날의 장소로 중심부가 옮겨졌다.
지금도 이 마을 복판에 옛 삼거리의 소로길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삼기원(三岐院) : 삼거리에 있었던 원(院). 성환찰방(成歡察訪)에 속하였으며
공무로 지방에 가던 관리가 묵고 가던 곳.(길손들이 쉬어 가기도
하였음) 지금도 삼기원이 있었던 곳에서는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듯
많은 와당편이 나오고 있다.

샛골(鳥洞) : 천안시에서 삼거리공원쪽으로 가는 길 왼쪽에 발달한 부락.
부락의 왼쪽에 천안삼거리 휴게소(고속도로변)가 있다.
윗샛골 아랫샛골 두 개의 마을로 샛골로 불리고 있다. 마을의 유
래는 새가 나르는 골이라 샛골이라고 하였다 하나 본래는 사이골
(間谷)이다. 산기슭과 기슭사이에 발달된 마을이라 사이골이 변해
서 샛골이다.

둔지동(屯地洞:조리터) : 변전소 입구에서 삼거리공원을 향해 가다가 길위쪽에
발달한 마을.(벨금속공장이 있다) 마을의 생김새가 복조리 같다하
여 조리터라고도 한다. 또 두둑하게 언덕진 곳이라하여 둔덕골이
라고도 부른다.
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왔을 때 군사
가 주둔하였던 곳이라 둔지동이다.

무상동(舞裳洞:방죽말) : 동리앞에 방죽이 있어 방죽말이다. 지금은 오작교와
팔각정 영남루등이 있어 연못을 키웠으나 본래는 작은 방죽이다.
이 마을을 무상동이라고 한 까닭은 풍수지리설에서 온 동명이다.
마을 앞산인 玉女峰의 玉女가 열두폭의 치마를 입고 가지런히 펴고
앉아 무릎위의 가야금을 뜯고 이따금 일어나서 춤을 추는 형상의
지형으로 방죽마을이 玉女의 치마폭에 해당되는 곳이라 舞裳이라
는 동명이 붙었다. 삼룡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천안삼거리 개발과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다.

부처골(佛谷) : 고속도로와 국도가 교차되는 곳에서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 작은 암자가 있었고 부처가 있어 부처골이라고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지경터(地境) : 천안여자고등학교의 북쪽언덕 너머를 지경터라고 한다.
옛날 조선말기에 木川縣과 天安郡의 경계가 되는 곳이라 地境터라
고 하였다. 옛날에 새로 부임하는 목천현감이 천안군 땅을 지나게
되므로 현감을 모시는 말이나 교자가 이곳에 까지 와서 대기하였다
가 모시고 가는 경계지역이다. 신임 사또가 부임하면 여기서부터
나팔이나 새납을 불고 앞장서면 신임현감의 부임을 알렸다하여 나
팔터라고 전한다.

선치미(線針이) : 玉女峰 앞의 골짜기. 女子들이 치마에 주름잡는 일을 선침한
다고 한다. 옥녀봉의 옥녀가 입고 있는 치마의 주름에 해당하는
곳이다. 선침밑이 변하여 선치미로 불려지고 있다.

비석거리(碑石假:蛇頭穴) : 무상부락(방죽말)앞 국도왼편에 坡平君氏의 묘가 몇
개 있고 묘앞에 상석과 비석이 있어서 비석거리라고 하였다.
이 묘소에는 재미있는 풍수지리설이 전해오고 있다. 묘가 있는 낮
은 구릉을 사두혈(蛇頭穴)이라고 하여 뱀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전한다. 길건너의 방죽에서 뛰어 놀고 있는 개구리를 잡을
욕심으로 잔뜩 노리고 있는 지형인데 그 후손들이 묘소 앞에 석물
(石物)을 세워 뱀이 방죽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를볼 수 없게 가리게
되면서 후손들이 잘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뱀의 먹이가 되는 개구리를 볼 수 없게 되므로) 최근에는 모두 이
장하고 비석도 없어졌다.

영남루(永南樓) : 천안삼거리공원 안에 있는 문루. 본래는 중앙초등학교 교정의
서쪽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1603년(선조 35)에 세워진 화축관
(華祝館)의 문루로 있었던 것을 1959년 삼거리 공원의 연못 옆에 옮
겨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3층석탑(留麗王寺) : 삼거리공원 안에 있다. 원래 있었던 곳은 지금의 상명대학
교 본관 건물 아래 남쪽의 보리밭이었는데 지주 이관영이 발굴하여
당시 환성면장 송제한이 삼거리 입구(대전과 목천의 갈림길)에 세웠
으나 그후 천안시가 공원 안에 옮겨 세웠다. 유려왕사탑이라고 전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당초에 몇층인지도 알지 못한다. 3층의 옥개
석과 상륜부분은 없어졌으나 옥개석은 새로 만들어졌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이 탑이 있었던 절에서 묵었다
고 留麗王寺라고 하였다.

탄금밑(彈琴밑) : 현재의 신애고아원이 있는 곳이다. 玉女峰의 옥녀가 예쁜 치
마를 입고 무릎위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뜯고 있는 형상이다.
彈琴밑이라고 하였던 곳이 탄금밀로 변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수백년 전부터 탄금밑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이 자리에 고아원이 서
고 風琴소리가 나게 되므로 彈琴의 풍수지리가 맞았다고 한다.

갈미봉(갓모봉:옥녀봉) : 옥녀봉을 말한다. 옛날 갓을 썼던 시절에 비가 오면 갓
이 비에 젖게 되므로 갓위에 한지를 기름먹여 만든 "갓모"라는 것이
있었다. 갓모와 같이 끝이 뾰족하게 닮았다 하여 갓모봉이 갈미봉
으로 변했다.

마망산(馬望山) : 천안여고가 있는 뒷산이다. 다른말로 맹산(孟山)이라고도 부
른다. 신창孟氏의 종산이었던 고로 맹산이라고 하였다. 또 말이
우뚝 서서 천안삼거리의 길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이라 마망산이라고
도 부른다.

동그락산 : 동여자중학교가 있는 산이다. 산지로부터 외떨어져서 동그랗게 된산
이라 동그락산이다.

나반들 고개 : 천안삼거리에서 목천면 응원리를 거쳐 신계리로 이어지는 고개.
고개 중턱 천안쪽으로 넓은 반석이 있어(넓은돌고개)가 변해서 나반
들 고개가 되었다.
1986년 넓은돌은 천안향토사가 들에 의하여 지석묘(고인돌)로 밝혀졌
으나 독립기념관이 설치되면서 도로확장 관계로 도로옆에 해체되어
흩어져 있다. 또 영조때에 목천현감으로 있었던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대록지에 의하면 옛날에 납세를 은(銀)으로 할 때 이 고개가 천
안과 목천의 경계가 되므로 목천현감이 이곳에까지 와서 은을 납세하
고 갔다고 납은들고개(納銀峙)라고 하였다고 한다.
順菴 安鼎福은 영조대의 실학자로 東史綱目을 편찬하였다. 그는 목
천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현민이 그의 불망비를 세웠다.
(독립기념관에 보존)

온양고개 : 삼거리에서 청당동을 넘어 용곡동 앞을 지나 온양가도에 이르는 곡.
온양으로 통하는 고개라 하여 온양고개라고 하였다.

배넘어고개 : 샛골(鳥洞)에서 목천면 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설에 의하면
천지창조때 큰 배 한척이 이 고개를 넘어 이빠진산(경岩山)을 지나다
산정상부에 부딪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배(舟)가 넘어갔다고 배넘어
고개라 하나 사실을 고개 마루턱에 오래 묵은 배나무가 있어 배나무
고개가 변해서 배넘어고개가 되었다.

도리티고개(廻峙) : 삼룡동 천안삼거리에서 천안군 목천면 삼성리로 넘어가는 고
개. 굽이가 많이지고 가파른 고개라 돌아간다는 뜻에서 도리티다.
6.25 사변때는 미 24단 34연대 A중대가 포진했던 방어선으로 한때 치
열한 전투를 치렀던 고개다.

해너물 : 샛골 옆의 골짜기. 해가 넘어가는 골짜기라 해너물이다.

홍대용 시가비(洪大容의 詩歌碑) : 천안삼거리공원안에 있다.
천안군 수신면 장명이 낳은 조선영조때의 실학파중 북학파에 속하는
학자로 그의 詩歌를 돌에 새겨 金東旭박사의 주선으로 세웠다.
시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坤一草亭主人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겠고
재주스럽지 못하니 헛명예 있을쏘냐
수시로 좋은친구 찾아오면 아름다운
산나물 술안주가 일미라오.
난간에 비껴서서 거문고 타노니
곡조속에 슬픈사연 그뉘가 알겠는가.

독립투쟁 7의사비 : 삼거리공원에 세워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주
권수호에 몸을 바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려고 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신 천안시 출신 독립투사의 비다.
1961년 세웠다.

7의사 : 庾昌淳, 張斗煥, 柳重協, 趙種哲, 成達永, 姜奭周, 金鼎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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